My Ideal Idle.
내 게으름은 거의 모든 상황에 꽤나 공평하고 균일하게 발휘된다. 이번에도 비자 발급을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 여행 이틀 전에야 발급받았다. 태평한 천성은 또 아니라서 게으름이 발휘되는 동안에는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다. '비자 발급을 못 받아 입국을 못 하게 되면 어쩌지...' 아직도 게으른 나를 어디까지 용인해주어야하나 고민이다.
어디선가 인도 기차는 최대 세 시간씩 연착하거나 늦게 출발한다는 얘기를 듣고 꽤나 반가웠다. 이런 나의 고질적인 게으름이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. 첫 기차는 티켓 구매를 미루고 미루다 티켓 카운터가 닫혀 타지를 못했고, 비행기도 한 번 놓쳤다.
인도의 관대함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나 싶어 이번에는 한 시간쯤만 늦게 갈 생각이었다. 그래도 사람인지라 인도 출국 전에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해둔 기차였다. 그 날 8시에 같이 아침을 먹기로 한 여행자들이 있었지만 10시가 넘어 일어나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했다. 고맙게도 그들은 짧은 메모를 남겨주었다. 답장은 천천히 할 생각이다.
호스텔 체크아웃 시간까지 최대한 게으름을 피우다가 카우치서핑으로 알게된 누군가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. 오후를 함께 보낸 후 7시까지 기차역에 갈 계획이었다. 오후 두 시쯤 카우치서핑 아저씨가 사는 곳에 도착했지만 그 아저씨는 5시가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. 집은 십분 거리라 했다. 세 시간 동안 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일로 늦는걸까 궁금하기만 했다. 단지 게으름 때문이라면 나는 그를 존경하고 싶다. 나도 다른 사람을 세 시간 동안 기다리게 할만큼 내 게으른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.
본디 30분 정도 얘기만 하다 이동하려 했지만 얘기가 길어져 6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를 타게 됐다. 기차역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는지라 조금 불안했어야 정상이지만 대화가 너무 즐거워 불안감도 느끼지 못했다.
한 시간 늦게 도착할 것을 알면서도 세상 모든 시간이 내 것인것처럼 이렇게 편안했던 적은 처음이었다.
기차역에 도착하니 이미 기차는 제 길을 떠났다. 나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충 시간을 죽이다 다음 기차를 탔다.
나는 내 게으름을 사랑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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