그 때 가지 못했던 인도를 기억하며
2년 전 일이다.
그 해 여름에는 어디로 여행을 갈지 미리 정하지 못하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 이곳 저곳 알아보는 중이었다. 그 전 해에 홀로 여행을 다녀와서 이번에는 친구 녀석들과 같이 갈 계획이었다. 내 친구들은 모두 유년시절부터 중국에서 같이 자랐기 때문에 해외 경험은 있지만, ‘해외 여행 경험’은 없었다. 친구들 중 몇몇은 아예 중국에서 태어났고 대학 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쭉 그 곳에서 살았다. 내 친구들은 휴양지 느낌의 동남아를 가고 싶어했지만 나는 몇 번 가 본터라 이번에는 더 먼 나라인 인도를 가고 싶었다.
인도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벌써 인도에 가 있었던 것 같다. 인도에 두고 온 마음을 다시 찾으러 가야했다. 힌두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지금에야 환생 이전의 내가 인도인이 아니었을까하는 별 시덥잖은 생각도 해보지만 그 때는 인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.
당연하게도 인도 여행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.
그 때는 스리랑카가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었다. ‘홍차의 꿈 실론티’는 알던터라 스리랑카가 옛날에는 실론 왕국으로 불렸던 것과 대강 어디쯤에 있는 나라인지 정도는 알았다. 하지만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. 어떻게든 인도와 관련있는 곳을 가고 싶어 스리랑카는 어떨지 알아보기 시작했다. 웹서핑 중에 스리랑카를 ‘인도의 눈물’로 비유한 문장을 읽고서는 더 볼 것도 없이 스리랑카를 가기로 마음 먹었다. 다행히도 좋은 친구들을 두었던터라 그들을 설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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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년 전 일이라 우리의 첫 ‘커리’ 경험을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낭만적인 왜곡이 섞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때 그 커리는 정말 강렬했다.
쿠알라룸푸르 경유로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(여행 전까지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이다..)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지도 않은 채 중앙시장에 있는 로컬 커리집에 갔다. 그 때가 우리의 첫 커리 경험이기도 했지만 첫 언어장벽 경험이기도 했다. 운이 좋게도 중국어와 영어를 할 줄 알아 관광지를 다니며 의사소통이 안 되었던 적이 없었다.
커리집의 벽들은 유리 타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장식이 없어 온통 하얬다.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온 스리랑카를 모두 다 담아놓은 것 같았다. 벽에 달린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이해 못 할 말들과 검은 눈동자들, 강렬한 향신료 냄새와 몸냄새가 뒤섞였다. 메뉴판은 없었던 것 같다. 진열해놓은 음식들을 손으로 가리켰고 손가락을 모두 펴 다섯 접시를 주문했다. 나 혼자 여행했다면 매우 당황했을 것 같았지만 친구들과 동행했기에 조금 덜 당황할 수 있었다.
커리는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다. 다섯 접시 중 두 접시나 겨우 비웠을까. 내가 이 식당을 골랐기에 민망했지만 당당하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어 열심히 먹었다. 정말 열심히 먹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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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우리는 여행 둘째날부터 ‘국제적인 음식’들을 먹기 시작했다. 여행에 편법이 어딨겠냐만은 어딘지 편법을 쓰는 기분이었다. 그 죄책감 때문에 피자나 햄버거를 먹으면 그 다음 이틀간은 커리를 먹는 식이었다.
비록 그 때 그 경험이 새로운 어떤 것을 체험하는 완벽한 ‘첫경험’은 아니었지만, 아직도 나는 ‘새로운 경험’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그 때 그 커리가 생각난다. 그 때 이후로 내 세상에는 더 많은 향과 더 많은 색깔이 덧입혀졌다.